돼지의 변신, 신영복, 최영미, 괴물, 고은
돼지의 변신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최영미
● 1961년 서울 출생.
●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시작.
●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 1997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 1998년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 2002년 산문집 '화가의 우연한 시선'
● 2005년 세 번째 시집 '돼지들에게': 실명을 거론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들을 ‘돼지’라고 불렀습니다.
신영복
● 1941년~2016년
● 작가,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 (진보적 학자로 분류)
● 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공산혁명조직 지하당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주범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 신영복은 무기징역
●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
● 1968년 희대의 간첩단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전향서를 쓰고) 무기징역
●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
● 1988년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을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출소 후,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를 역임
● 2003년 《더불어 숲》
● 2006년말에 정년 퇴임
● 퇴임 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써 주고받은 1억 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
●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 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 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고은 시인 성추행
최영미 시인은 2017년 ‘황해문화’ 겨울호에 고은 시인의 성추행 등을 고발하는 내용의 ‘괴물’을 실었습니다. 이 시에 고은 시인을 ‘En’으로 표기했습니다. 최영미 시인은 2018년 2월 실명 고발했습니다.
1992~1994년 봄 사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 술집에선 벌어진 고은 시인의 성추행 목격담을 동아일보에 공개했습니다. 고은 시인은 그해 7월 최영미 시인과 동아일보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1심과 2심에서 패소했습니다. 대법원 상고를 하지 않아 최영미 시인 승소가 확정됐습니다.